오마하 해변을 기억하는 두 통의 편지 by 척 키스

알파캣님의 오버로드 작전 하편(링크 새창)에서 구축함의 근접화력지원 장면을 보고 예전에 읽었던 이야기가 생각나서 남겨봅니다. 

1945년 6월 19일 뉴욕항에서 촬영된 그리브스급 구축함 프랭크퍼드 함(DD-497)


※즈질 번역이라 영어되시면 원문 읽으시길 바랍니다.

To the USS Frankford crew,

 It is only natural that you recall where you were and what you were doing during the early hours of June 6, 1944. But I don't believe that you are aware of the results of that terrific bombardment that you poured into Omaha Beach when you came in oh so close.

 I landed on Omaha Beach with the first waterborne assault wave (H-hour) plus three minutes. I was a member of a special demolition team of the 299th Combat Engineer Battalion, and our mission was to blow eight 50-yard gaps in all three rows of obstacles in front of the 1st Infantry Division's eastern half of Omaha Beach.

 Casualties ran nearly 50 percent the first few hours, but more than 1,000 men managed to survive and reach the dune line where they were pined down by such murderous machine gun, sniper and mortar fire that any movement meant almost certain death. The situation looked hopeless when, all of sudden, at about 10 a.m., a destroyer loomed out of a sea swarming with dozens of landing craft and amphibious vehicles. Even though she wasn't listing or smoking, my first thought was that she had either struck a mine or taken a torpedo and was damaged badly enough that she was being beached.

 While I was coming up with my reason for the destroyer to head in, she started to turn right and before she completed the turn to be parallel to the beach, all her guns opened fire. At the same time I saw smoke leave the gun barrels, shells landed a few yards above us.

 As the destroyer proceeded toward the western end of the beach, I continued to watch her and wondered how she could be so close without taking any artillery or mortar hits. I watched her go farther and farther from me and expected to see her pull out to sea any minute, when suddenly I realized she was backing up and her guns had yet to pause since commencing fire. 

 She backed up almost to where she had started, went dead in the water for second time, still to my knowledge without tacking a hit, and again headed toward the other end of the beach with all guns still blazing. When she reached the western section fo beach, she pulled back out to sea.

 There is no question, at least in my mind if [Frankford] had not come in as close as you did, exposing yourselves to [great danger], I would not have survived overnight. I truly believe that in the absence of the damage you inflicted on German emplacements, the only way any GI was going to leave Omaha was in a mattress cover or as a prisoner of war.

 My best to each and every one of you and many, many thanks.

Cordially,
James E. Knight


프랭크퍼드함 승무원들에게,

 1944년 6월 6일 이른 시간에 
당신이 어디 있었는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회상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난 당신들이 오마하 해변에 너무나도 가까이 흘러들어와서 아주 좋은 포격을 날린 결과를 알고 있는지 믿을 수 없습니다.

 저는 오마하 해변에 강습상륙 1파로 (작전 개시시간) 3분 뒤에 상륙했습니다. 저는 제 299 전투공병대대 특수폭파팀의 일원으로 우리의 임무는
오마하 해변의 제 1 보병사단 동쪽 절반 전면에 위치한 장애물들을 폭파해 총 3열로 8개의 50야드(45.72m)의 통로를 확보하는 것이 였습니다.

 첫 몇 
시간 동안 사상자가 거의 50%에 달했지만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아남으려고 애썼고 사구 선까지 도달해서 어떤 움직임도 확실한 죽음을 뜻하는 살인적인 기관총, 저격수, 박격포 사격에 꼼짝 못했습니다. 상황에 희망이 없어 보일 무렵인 오전 10시경에 갑자기 구축함 한 척이 수십척의 상륙정 및 수륙양용 차량과 떼를 지어 바다에서 서서히 나타났습니다. 비록 구축함이 불타거나 연기가 나는 것은 아닐지라도 전 구축함이 기뢰에 맞았거나 어뢰에 맞아서 심각한 피해를 입고 해변으로 쓸려오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구축함이 진입한 이유를 떠올리는 동안 구축합은 우측으로 선회했고 해변과 수평이 되게 선회를 마치기도 전에 구축함의 모든 함포가 불을 뿜었습니다. 동시에 구축함의 전 포신에서 나오는 포연과 수 야드 위로 
우리를 지나쳐 착탄하는 포탄을 볼 수 있었습니다.

 구축함이 해변의 서쪽 끝으로 나아가는 동안, 저는 쭉 구축함을 바라봤고 어떻게 구축함이 포격이나 박격포에 맞지않고 이렇게 가깝게 올 수 있었을까 궁금했습니다. 저는 구축함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바라봤고 지금 당장이라도 바다로 철수 할 것으로 예상했을 떄 갑자기 구축함이 되돌아오고 있고 포문을 연 뒤 아직 사격을 멈추지 않았다는 점을 깨닫았습니다.

 구축함은 거의 시작 지점까지 돌아왔을 때 
아직 피탄당하지 않은 사실은 알고 있었고 두번째는 성공하지 못 할거라고 생각했지만 다시 해변의 다른 끝을 향해서 나아가며 모든 포문은 여전히 불을 뿜었습니다. 구축함은 해변의 서쪽 지역에 도달해서야 바다로 퇴각했습니다.

 최소한 제 생각에는 만약 프랭크퍼드함이 스스로를 엄청남 위협에 노출시키면서 가깝게 오지 않았다면 의문의 여지 없이 전 그날 밤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저는 진심으로 
당신들이 피해 없이 독일군 포좌에 타격을 가했고, 미군이 매트리스 커버에 싸이거나 혹은 포로가 되지 않고 오마하 해변을 떠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믿습니다. 

최선을 다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대단히, 대단히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제임스 E. 나이트

From the seaward side

 I was the gunnery officer of the USS Frankford when she took part in the initial operations at Normandy on June 6, 1944. Her activities passed into memory until the reunion group started receiving letters from soldiers such as James Knight who were on the beach. Initially Frankford was engaged in setting the screen. Most of the other destroyers in the screen were released quite early to augment the gunfire support at the beachhead. About midmorning, they had expended their bombardment ammunition allowance and returned to the screen. Obviously, the job was not over. Frankford was released from the screen and ordered in to provide support wherever it was needed on Omaha Beach. We proceeded in the probably 1,000 yards and tried to contact our shore fire-control party.

 For reasons that became obvious later, we never had clear targets on beach. Unfortunately, German camouflage was excellent, so from that distance we could not see who was where of pinpoint anything to shoot. The tide was in our favor at the moment. Navigating by fathometer and seaman's eye, we went in close enough to use our optical rangefinder, ranging on the bluff above the beach, against the stops, 300 to 400 yards away.

 The camouflage on the beach was still good. We could not sopt a target, and frankly we did not know how far out troops had advanced. Then one of our light tanks that was sitting at the water's edge with a broken track fired at something on the hill. We immediately followed up with a five-inch salvo. The tank gunner flipped open his latch, looked around at us, waved, dropped back in the tank and fired at another target. For the next few minutse he was our fire-control party.

 By this time, we knew none of our troops were on the hill, so we used the rangefiner to pick out targrts, including apparently at least one artillery emplacemet. We did have the satisfaction of seeing our solders take some prisoners out of one of those bunkers. When we had expended our limit, we returned to our screen station, but not before seeing our troops moving up the hill toward the crest.

Owen F. Keeler


바다 쪽으로부터

 전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에서 작전이 개시되어 프랭크퍼드함이 참여했을 때 포술 장교였습니다. 프랭크퍼드함의 활동들은 전우회가 제임스 나이트 같이 해변에 있던 병사들로부터 편지를 받을 때까지 기억의 일부였습니다. 처음에 프랭크퍼드함은 경계진을 구성하느라 바빴습니다. 대부분의 다른 구축함들도 경계 위치에서 해제되서 꽤 일찍부터 륙거점에 대한 포격지원을 늘렸습니다. 9시에서 10시경에 구축함들은 포격용 탄약 사용이 허락됬지만 경계 위치로 돌아왔습니다. 확실히 경계 임무가 끝나지 않았었습니다. 프랭크퍼드함은 경계 임무에서 해제됬고 오마하 해변 어디든지 필요한 곳에 화력지원을 명령받았습니다. 우리는 대략 1,000 야드(914.4m)안까지 나아갔고 해안사격 통제반과 연락을 시도했습니다.

 이후에 기술하는 
이유로 우린 해변에서 명확한 목표를 확인 할 수 없었습니다. 불행이도 독일군의 위장은 탁월했고 그정도 거리에서 우리는 쏴야할 어떤 것도 정확히 볼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조수는 우리에게 유리했습니다. 음향 측심기와 견시의 도움으로 멈추지 않고 항해하여 해변 위의 절벽이 300에서 400 야드 거리에 이를 때까지 광학거리측정기를 사용하기 충분하게 접근했습니다.

 해변의 위장은 여전히 뛰어났습니다. 우린 목표를 관측 할 수 없었고, 솔직히 아군이 어디까지 진격했는지 몰랐습니다. 
그때 언덕에서 발사 된 무언가에 피격당해 해변 가장자리에 궤도가 부서진채로 주저앉은 아군 경전차 한 대가 있있습니다. 우리는 즉시 5인치 포 일제사격으로 지원했습니다. 그 전차병은 해치를 휙 젖혀열고, 우리를 둘러본 뒤, 손을 흔들고, 전차로 들어가서 또 다른 표적에 사격했습니다. 이후 몇 분동안 그는 우리 사격 통제반이였습니다. 우리는 거리측정기로 전차의 포탄이 명중하는 지점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서야 어떤 아군 부대도 언덕 위에 없다는 것을 알았고, 우리는 거리측정기로 적어도 한 개의 포좌를 포함한 목표들을 선택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쏜 벙커 중 하나에서 아군 병사들이 포로를 끌고 나오는 것을 지켜보며 흡족했습니다. 우리가 탄약 허용치까지 소모했을 때, 경계 위치로 돌아갔지만 아군 부대가 언덕 꼭대기로 이동하는 것을 보기 전이였습니다.

오언 F. 킬러

참고자료:
All Hands July 1994 number 926; p18-21 (링크 새창)


Ps: 왜 구축함대가 진작에 근접지원에 나서지 못했는지는 오언 F. 킬러씨의 답신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덧글

  • 알파캣 2015/05/06 23:14 #

    전문적인 글 감사해요 ^;^ 독자분들이 만화를 이해하시는 부분에 큰 도움이 될것 같네요.
  • 척 키스 2015/05/06 23:40 #

    예전에 관련된 글을 읽은 덕이죠. 과찬이십니다. 쿨럭~
  • 토나이투 2015/05/06 23:30 #

    데인저 클로즈 ㅠㅠ 위험하죠
  • 척 키스 2015/05/06 23:58 #

    경전차가 통제반 역활을 한 대목에서 현실이 영화보다 더 극적일 수 있다는걸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 GRU 2015/05/06 23:51 #

    외람된 말이지만 제가 워겜 하면서 상륙작전때 함대의 화력 지원이 없었다면 그냥 포인트 헌납하고 원균이 될뻔한 작전이 몆개 있었죠 ㅎㅎ..
  • 척 키스 2015/05/07 00:17 #

    이만하면 되겠지하고 상륙하면 꼭 뭔가 부족하더라고요.(:::)
  • 누군가의친구 2015/05/07 00:56 #

    워게임: 레드 드래곤의 1987 부산포위에서 인천에서 연막 피우고 해병대 병력 상륙하면 되겠지라는 발상으로 하면 망하기 딱 좋죠. OHP 호출해서 함포로 해안 정리 해주면서 상륙을 해야...ㄱ-
  • 척 키스 2015/05/07 10:30 #

    적룡뿐만아니라 다른 게임에서도 '그까이꺼 대충'이란 생각으로 하면 말아먹기 딱 좋더라고요.
  • 지니 2015/05/07 10:53 #

    그 전차병은 결국 살아남았을지 ...
  • CAL50 2015/05/07 11:18 # 삭제

    설령 오마하에서 살아남았어도 1945년 5월까지 살아남았을 확률은.... ㅜㅜ
  • 척 키스 2015/05/07 12:58 #

    해당 전차를 확인하고, 탑승자의 복무 내역을 확인하기 전까진 모를 일이죠.
  • 미망인제조기 2015/05/07 15:12 #

    관측병이 중요한 이유....
    경전차가 중요한 이유....
    .
    .
    .
    화력덕후가 중요한 이유...?????
    .
    오마하의 경우는 최근의 평가에서는 '약간의 준비를 마친 제리와 양키들의 종합적인 실수의 결과물'이라는게 중론이 되더군요.
    화력이야 뭐...127mm포가 좀 빈약해 보인다고는 하지만, 지상 화력에 비해서 꿀리지 않는 화력이고 분당22발 정도니 근접지원은 확실히 해준셈이겠죠. 요즘에서야 해군 화력이 공준에 밀린다고 하지만, 2차 대전 까지만 하더라도 해군의 해안 근접지원 능력은 안드로메다 수준.
  • 척 키스 2015/05/07 20:27 #

    관측병이 중요한 EU, 경전차가 중요한 EU, 화력덕후가 중요한 EU... 말 되네요. : )

    미해군과 미육군 웹상에 공개한 내용들 읽어보면 계획은 잘 세웠는데 하나씩 어그러지면서 피본 경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요즘엔 더 빠르게 더 멀리 더 정확히가로 트렌드가 바뀐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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