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ritish liaison officer in the United States raised the issue of equipping US tanks with the 17pdr. in August 1943, but Ordnance was largely indifferent to the offer for a variety of reasons. US officers who had seen the gun fired in Britain were surprised by its substantial muzzle flash and by the unnerving tendency towards flashback at the breech, which hinted at design problems. More importantly, a variety of US guns were in development, including both the 76mm M1A1 and new 90mm gun which were believed to be more than adequate to handle the German threat. The British first proof tested the 17pdr. in a Sherman turret only at the end of December 1943. Prodded by General Devers, a comparative shoot of the 90mm and 17pdr was conducted at Aberdeen Proving ground in the US on March 25, 1944, followed by a similar trial in Britain on May 23, 1944. The British offered to provide 200 guns and ammunition per month to the US within three months of notice. The comparative trials demonstrated that the 17pdr had superior performance over the American 90mm gun slated for new tank destroyers, to say nothing of the 76mm tank gun. However by the time that these assessments were made, both the 76mm and 90mm tank guns and ammunition were already in production in the US, and the 17pdr would not be available until well after the Normandy landings. Ordnance was not keen on adopting the British gun for variety of reasons. Its performance was slightly better than the 90mm gun, but Ordnance was developing T4 high velocity armor piercing(HVAP) ammunition that would boost 76mm gun performance to near the level of the 17pdr without the need to switch to yet another new gun and ammunition. There was also concern that British arsenals could not meet US demands for guns and ammunition. But the real problem was that the US Army in general did not have a realistic appreciation of the future tank threat. Attitude about the 17pdr option would change abruptly after the Normandy fighting began in June 1944
1943년 8월 미국에 배치된 영국군 연락장교가 미군 전차에 17파운드 포를 장비하는 제안을 했지만 병기국은 다양한 이유를 들며 이를 무시했다. 영국에서 실사격을 참관한 미 장교는 17파운드 포의 엄청난 포구 섬광과 약실방향으로 화염이 역류하는 위험한 성향에 놀랐고 이것이 설계 문제일 것으로 판단했다. 더 중요한 점은 개발 중이였던 76mm M1A1 포와 신형 90mm 포가 독일군의 위협을 처리하는데 충분할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는 것이다.
셔먼 포탑만으로 이루어진 17파운드포의 최초 사격 실증 시범은 영국군에 의해 1943년 12월 말에야 이루어졌다. 데버스 중장의 제안으로 90mm, 17파운드의 비교 사격이 1944년 3월 25일 에버딘 전차 시험장에서 시행되었고, 이와 비슷한 시도가 1944년 5월 23일에 영국에서 있었다. 영국은 3개월 내에 매달 200문의 17파운드포와 탄약을 미국에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비교 시험에서 17파운드포는 혹평받은 신형 대전차자주포(주1)의 미제 90mm 포 보다 약간 우세한 성능을 보여주었고, 76mm포는 말 할 가치도 없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76mm 와 90mm 전차포와 탄약이 이미 미국에서 생산 중이였고, 17파운드포는 노르망디 상륙 이후까지 사용이 불가능할 것으로 평가되었다.
병기국은 다양한 이유로 영국제 포를 도입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17파운드포의 성능은 90mm포보다 약간 우세했지만, 병기국은 새로운 주포와 탄약의 변경없이 76mm 포의 성능를 17파운드와 유사한 수준을 강화 할 T4 고속철갑탄(HVAP)을 개발 중이였다. 게다가 영국의 조병창이 미군의 포와 탄약 수요를 감당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미육군이 대체적으로 현실적인 미래 전차 위협에 대해 공감 하지 못한 것이다. 17파운드포 옵션에 대한 태도는 1944년 6월 노르망디 전투가 시작된 뒤 급격하게 변경 된다.(주2)
출전: M4(76mm) Sherman medium tank 1943-65; Steven J. Zaloga; Osprey Publishing: 2003; p.8~10 주3)
44년 6월까지 미군의 17파운드 포에 대한 의식은 거의 없었습니다. 병기개발국에선 17파운드 포를 결함 포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미군 수뇌부에서는 노르망디 상륙 전까지만 해도 76mm 포면 모든 문제가 해결 될 것이라는 신념에 차 있었죠. 이러한 미군의 76mm포에 대한 확신은 치프틴 해치에서도 나타납니다. THE SHOEBURYNESS TESTS: 23 MAY, 1944 항목의 마지막 문단은 다음과 같죠.
US Army commanders were so confident in their guns, and so complacent about the risks posed by the Panzers, that there was no call for 90mm-armed vehicles, no recommendation for further up-gunning beyond the 76mm gun, and no call for improved penetration for the existing ammunition (beyond fixing the fuses). British offers of the 17pr were politely declined as unnecessary. So complacent were the US commanders, in fact, that the 100 up-gunned Shermans with 76mm guns that had been rushed to the ETO were turned down by unit commanders as being an un-necessary complication to their logistics and training, and were left behind in the UK on D-Day.
미군 지휘관들은 그들의 화포들을 과신했고, 독일 전차들에 대한 위험을 과소평가하여 90mm포를 장비한 차량에 대한 요청을 하지 않았으며, 76mm포 이후의 업건에 대한 권고도 없었고, 신관 문제를 고칠 때까지 현재 탄약의 관통력 개선에 대한 제안도 없었다. 불필요한 영국의 17파운드 포는 정중하게 거절되었다. 자신감에 찬 미군지휘관들은 76mm포로 업건한 100대의 셔먼을 미육군유럽사사부(ETO)로 보냈고, 이를 야전 지휘관들은 군수 업무 및 훈련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 거부했으며, 노르망디 상륙작전시 영국에 남겨졌다.
출전: 치프틴 해치; http://worldoftanks.com/news/919-chieftains-hatch-us-guns-vs-german-armour-part-1/
애초에 43년도 있었던 영국의 연락장교의 제안은 8월에 있던 일로 11월에야 모습을 드러낸 파이어플라이에 탑재되는 17파운드 전차포의 시제형인 SH-SH포 개발되기도 전에 이루어진 것이였죠. 당시 미국이 영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포가를 M10 울버린에서 빌려온다 하더라도 신형포탑 설계와 제작(혹은 포탑의 개조작업), 신규 포신과 탄약생산라인을 확보해야 할 상황이였던겁니다.
그에 반해 90mm와 76mm 포의 상황은 어떠했을까요? 42년 10월에 T7 90mm 포를 M10과 T1E1 포탑에 설치해서 포가 개발과 실사격 테스트가 끝났고, 43년 9월에 이르러서 M3 90mm 포라는 제식명칭을 받습니다. 76mm포 역시 41년 3"포를 셔먼에 장비하는 것을 목표로 시작되어, 42년 75mm포탑에 M1 76mm 포를 장비한 M4A1(76M1), 43년에 이루어진 T80 포탑장비 M4E6, T23 포탑장비 M4E6를 통해 개발이 종료되고 43년 6월에 양산이 결정난 상황이였지요. M10 대전차 자주포와 M3 대공포 덕분에 두 종류(76mm, 90mm)의 포의 포신와 탄약 생산라인은 이미 확보된 상황이였습니다.
게다가 43년 12월에 파이어플라이 실사격 성공이 있었을 때 미군의 유럽진공을 위한 44년도 전차 생산계획은 이미 완료 된 상황이였고, 파이어플라이 수량 확보가 부족해서 M10C 아킬레스의 개수가 이루어졌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영국에서 개조된 셔먼 17파운드를 미군이 노르망디에서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요. 게다가 미육군의 교리상 전차잡는 전차로 만들어진 파이어플라이가 채택될 것도 의문이고, 유럽진공을 만 5달 남겨둔 상황에서 미국내에 17파운드 포와 탄약 생산시설을 확충하고 M4 셔먼과 M10 울버린에 개수작업을 하는 것 역시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이였죠.
미군 수뇌부는 44년 3월과 5월 시험에서 500야드 거리에서 30도 경사의 100mm 장갑을 관통하는 76mm면 충분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신관이 조기작동하는 90mm와 더 나은 관통성능을 보여준 17파운드에 대해 진지한 고려를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76mm 셔먼(M4A1 76mm) 100대를 유럽에 보내는 것으로 만족해버렸고, 75mm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는 일선에선 76mm 셔먼의 상륙당일 투입을 배재해버립니다.
A letter from US 12th Army dated 13 August 1944 requests that sufficient Fireflies be made available until such time as the new American 90mm gun was ready or improved ammunition for the 76mm gun was issued. In all respects, it was a forlorn hope. The British were struggling to produce enough Fireflies for themselves, the Canadians and the Poles in France, and the Italian theatre was also demanding them. The Americans were a long way down the list. In the United States, British liaison officer Brig G. McLeod Ross suggested that the 17-pounder gun should be mounted in the larger T23 turret, designed for the 76mm Sherman, but mounted on the new American T26 chassis. This was turned down on the grounds that the T23 turret was inadequate in terms of armour, and the alternative - to fit the 17-pounder into the T26 turret in place of the designed weapon, the 90mm - was regarded as a waste of effort; all this despite the fact that it was believed that the British gun would outperform the larger American gun. One report said, 'It will doubtless take a lot of pressure to make the USA adopt the 17-pr, but it would be well worth while.'
1944년 8월 13일 미 제 12군은 편지를 통해 새로운 90mm 포가 준비되고, 76mm 탄약개선이 될 때까지 파이어플라이가 충분히 사용가능 할 것로 판단하고 요청했다, 모든 측면에서 이는 허망한 요구였다. 영국은 충분한 수량의 파이어플라이 생산을 위해 발버둥치고 있었고, 프랑스의 캐나다군과 자유 폴란드군 그리고 이탈리아 전선에서도 파이어플라이를 요청하고 있었다. 미군은 그 긴 목록 최하단에 위치했다.
미국에 있는 영국군 연락 장교인 맥러드 로즈(McLeod Ross) 준장이 17파운드 포를 76mm 셔먼을 위해 설계된 더 큰 T23 포탑에 장비 할 수 있을 것이고, 이를 신형 T26 차대에 올릴 것을 제안했다. 이는 바로 기각당했는데 T23 포탑은 장갑이 부족했고, 영국의 17파운드 포가 더 큰 미국의 90mm포보다 더 나은 성능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90mm 포를 위해 설계된 T26 포탑에 17파운드 포를 장비하는 대안은 쓸데없는 짓으로 간주되었다. 한 보고서에서는 '미국이 17파운드포를 채용하도록 많은 압력을 가한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아직까지 성과는 없다.'라고 언급한다.
출전: Sherman Firefly 1943-65; David Fletcher; Osprey Publishing: 2008; p.44 주4)
44년 6월에 판터쇼크가 터진 후, 해결책을 알아보던 미군은 8월에 결단을 내립니다. 90mm 전차와 76mm HVAP탄이 유럽에 도착 할 때까지 일단 파이어플라이로 버터보려고 하죠. 44년 7월 아이젠하워가 본국으로 보낸 홀리준장에 의해 90mm포를장비 M36, T26E3 양산에 최선을 다하기로 결정하고, 퍼싱 포탑을 탑재하는 셔먼 90mm 계획은 기각 된 상황이였습니다. 이때 이뤄진 영국의 제안은 76mm 포를 장비하던 T23포탑에 17파운더를 달고, T26차대를 사용하는 방안이였습니다만 이미 90mm M3 포와 탄약, 90mm 포를 장비한 M36이 양산되고 있고, T26E3 양산에 총력을 다하기로 결정한 미국이 매력을 느낄만한 제안은 결코 아니였죠.
There was widespread criticism of the lack of effective tank guns on US medium tanks in the wake of the Battle of the Bulge in December 1944 - January 1945. The issue became a major controversy in the United States in January 1945 when the New York Times ran a series of articles by their military correspondent, Hanson Baldwin, that led to calls for a Congressional investigation into the scandal. At the beginning of January 1945, only about a quarter of the M4 tanks in the ETO were the M4 (76mm). Senior Army commanders attempted to solve this problem in three ways: to stop the shipments of any further 75mm M4 medium tanks in favor of the 76mm tanks, to re-arm 75mm tanks with the 76mm gun, and to restart the long delayed effort to convert some 75mm tanks to British 17pdr.
1944년 12월에서 1945년 1월까지 이어진 벌지 전투의 결과로 미군 중형전차의 전차포성능 부족에 대한 비난이 확산되었다. 이 문제는 1945년 1월 뉴욕타임즈 군사전문 기자인 핸슨 볼드윈(Hanson Baldwin)의 연재 기사가 나간 뒤에 미국에서 논란이 되었고, 미의회 조사로 이어졌다. 1945년 초 유럽전선의 76mm포 장비 셔먼은 전체 셔먼의 약 25%만을 차지하고 있었다. 미육군의 고위 지휘관들은 이 문제를 세가지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이는 76mm포 셔먼을 위해 향후 모든 75mm포 장비 셔먼의 선적의 중단, 75mm 셔먼을 76mm 포로 환장, 오랜기간 지연된 일부 75mm 셔먼을 영국제 17파운드포로 개조사업의 재시작이었다.
출전: M4(76mm) Sherman medium tank 1943-65; Steven J. Zaloga; Osprey Publishing: 2003; p.33
결과적으로 45년에 셔먼에 17파운드 포를 장비합니다만, 단순히 미군이 17파운드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린 것이 때문이 아니였던 겁니다. 45년 1월 핸슨 볼드윈(Hanson Baldwin)의 기사로 촉발된 미국 내에서 자국전차에 대한 비난 여론이 비등하고 이에 따른 미 의회의 조사까지 이루어집니다. 45년 1월초 유럽전선의 76mm포 장비 셔먼이 전체 셔먼의 25%밖에 안 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기위한 3가지 제안이 중 하나로서 파이어플라이가 도입되었던 것입니다.
첫번째 제안은 75mm 포 장비 셔먼들의 선적을 중단하고 이를 76mm 포 장비 셔먼으로 대체 것으로 이는 실제 76mm 포 장비 셔먼 증원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두번째 제안은 기존 75mm 포 장비 셔먼들의 무장을 76mm로 변경하는 것으로 이에 해당하는 두가지 사례가 있었습니다. 우선 75mm 포로 무장한 M4A3E2 약 100대를 현지개수를 통해 76mm로 업건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75mm 셔먼의 업건 계획은 무산되지요. 이는 M4A1(76M1)처럼 75mm포탑 후방 연장, 무전기의 이동, 카운터웨이트를 장비해서 76mm포를 장비하려는 계획이였습니다. 포탑 후방 연장에 사용 할 장갑판 부족으로 45년 3월초에 중단되었다가 장갑판을 확보한 3월 중반에 45~60일 일정으로 첫 개수분 300대의 개조가 시작됩니다만 4월에 들어 76mm 셔먼이 충분히 확충되어 업건 계획은 취소됩니다.
마지막 제안은 일부 75mm 포 장비 셔먼들을 영국에서 개수해서 17파운드포를 장비 방법으로 장갑묘님이 "크리스마스의 악몽과 미국 파이어플라이의 등장" 에서 이미 다루셨죠.(링크 새창) "M4(76mm) Sherman medium tank 1943-65"가 동일 저자(스티브 잘로가)의 책인지라 미군의 17파운드 개수에 대한 기술은 동일합니다.
미군의 병기개발과 배치는 필요성(Battle needs)과 신뢰성(Battle worthiness)원칙을 고수해서 우연과 예기치 않은 요소는 상당부분 배제됩니다. 미군의 M4(17pdr)과 M4A3(17pdr) 도입은 벌지 전투에 따른 우연과 예기치 않은 요소라고 중언부언하는 것보다 벌지전투에 따른 전선부대의 요청이 아이젠하워를 통해 공식화되고, 미국 내 여론 악화와 이에 따른 미의회의 조사, 75mm 셔먼의 화력강화 방안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하는 쪽이 올바른 시각이라 생각됩니다.
4줄 요약
- 44년 6월 까지 미육군은 17파운더에 관심이 없었고, 76mm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 생각했다.
- 44년 6월 이후 T4 76mm HVAP탄과 90mm 전차포 M3을 미군 전차의 화력 강화안으로 생각했고,
- 17파운드포 셔먼이나 차기 전차포로서 대규모 채용 계획은 없었다.
- M4(17pdr)과 M4A3(17pdr)도입은 75mm 셔먼의 업건에 따른 결과물이며, 매우 제한적인 수량만이 도입되었다.
주1) 여기서 언급된 혹평받은 신형 대전차자주포는 M36 잭슨(당시 형식명칭 T72)으로 양산이 시작된 상황이였으나, 제식명칭을 부여받지 못한 상황이였습니다.
주2) 미군 수뇌부와 병기국이 76mm 포를 그렇게 신뢰한 것은 치프틴 해치 발르루아 테스트 항목(THE BALLEROY TEST: 10 JULY, 1944)에서도 밝히듯이 독일 전차의 장갑 강도(260~340BNH, 4호의 경우 50mm 588BNH 장갑과 30mm 365BNH의 조합)를 자국 수준(210~240BNH)일 것으로 판단하고 실제 독일 전차의 장갑 강도에 못 미치는 장갑판(240BNH)에 사격을 가한 뒤, 그에 대한 결과를 믿었기 때문이죠. 아이젠하워가 브래들리에게 76mm 포의 위력부족에 대한 보고를 받고 "병기개발국 애들이 76mm면 다 될꺼라고 했단 말이야!!!" 절규(?)했던게 이러한 이유였던겁니다.
주3,4) 원문은 하나의 문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가독성을 위해 문단을 나눴습니다.
PS1: 187대가 제작된 M36B1, 254대가 제작된 M4A3E2를 생각해본다면, 솔직히 80여 대가 개조 된 미군의 M4 (17pdr) 도입이 의미있는 수량인지는 의문이 듭니다.
덧글
그러고보니 미 해군의 경우 MK14 어뢰는 그 테스트 결과를 가지고 쓸데없는 믿음때문에 잠수함 함장들의 불만을 무시하고 사용되다가 44년에서야 문제점을 개선되고나서 대활약했지만 말입니다.
PS: 혹시 학교 도서관에 칼 되니츠 제독의 회고록인 '10년 20일'이 있다면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미군 기갑부대 데뷔전에서 그렇게 갈려나간건 성능 격차도 있지만 FM에서 그렇게 강조하던 정찰, 우회기동, 측후면공격, 제병합동공격을 싹 무시하고 정면돌격한 결과입니다. FM의 모범적인 수행 사례는 셔먼(대다수가 75mm 장비)과 헬켓을 가지고 항공지원없이 기동으로 판터들을 찜쩌먹은 4기갑사단 좌익전투단(4th Armored Combat Command A) 낭시 전투사례를 한번 찾아보시길 권합니다.
Ps: 진짜 난맥은 사주와 국가지도자의 개인적인 친분을 이유로 90대의 차대를 미리 생산에 들어간다던가, 기계적인 결함을 무시하고 전장에 신형전차를 투입하는 것 아닐까요?
P.S. - 이전부터 흥미가 생겨 미군의 대전 기간 중 실험 전차들을 찾아보게 되면서 처음 접했을 땐 '이 전차들을 전장에 내보냈다면'식으로 생각했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미군 지휘부가 셔먼 기반만 중용하기로 밀고 나간 게 차라리 다행 아니었을까?' 싶어지더군요.
미육군 제식명칭으로 M4 (17pdr)이 되겠지만요.
제식명칭이라는게 사용자 따라가니까 미군이 개조한 M4A3기반 17pdr장비형은 "셔먼 IVC 파이어플라이"가 아니라 "M4A3 (17pdr)"이 되겠죠.
사진 자료가 거의 없고, 오히려 M4 17pdr의 경우 구형 큐폴라(이건 본문에 링크건 장갑묭 블로그와 M4(76mm) Sherman medium tank 1943-65; Steven J. Zaloga; Osprey Publishing: 2003; p34 사진을 참조)도 있는지라... 전차량이 비전 큐폴라 탑재차량은 아닌듯 하고, M4A3 17pdr에만 해당하는 사항이 아닌가 싶습니다.
PS: 8,000전 돌파 축하합니다.
90mm 포면 지금도 사용중인 포로 알고있는데..
사용 탄종이 싹 바뀐지라 관통력면에선 더 나아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게다가... 풍산에서 90mm 전차포용 날개안정철갑예광탄 APFSDS-T, K241 까지 찍어내는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