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갑묘님 포스팅인 레슬리 맥네어 중장과 미국의 대전차포 부대(링크 새창)와 관련된 포스팅입니다. 오스프리 뉴뱅가드 M10&M36 과 M26&M46를 요약한 잡설 정도의 수준이니 그냥 적당히 보고 넘어가시면 됩니다.







사족: 쿠르스크 전투에서 노획된 판터를 통해 43년 가을경에는 성능 보고서가 이미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탈리아에서 판터를 직접 마주친게 늦어도 44년초 안지오 상륙 이후라는 걸 생각해보면 노르망디에서 판터쇼크의 책임은 후행적일 수 밖에 없는 원칙주의[필요성과 신뢰성]를 고수한 미국 지상군 사령부에 있다고 봐야겠죠.
1942년 병기국은 미육군의 요청은 없었지만 3"보다 더 강력한 주포를 가진 대전차자주포에 대한 연구를 시작합니다. 독일군이 88mm 대공포를 대전차포로 사용한다는 보고를 보고 "덕국 덕후들도 하는데 우리도 질 수 없음!!!"이란 생각이였을지도 모르죠. 비슷한 체급의 90mm 대공포를 얹어서 써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나온 물건이 M4 셔먼 차체에 90mm 대공포를 얹은 90mm GMC(Gun Moter Carrier) T53 입니다.
1942년 8월 미국 지상군 사령부와 병기국은 당장 T53 500대를 양산하고 최종적으로 3500대를 채용하려합니다. 그러나 대전차자주포 사령부에서는 1)충분한 평가가 없었고, 2)M10 보다 뒤떨어지는 디자인이잖아! 라고 퇴자를 놓습니다. 최소한 운용요원들을 보호해줄 포방패도 없이 덜덩 90mm포 하나 얻어놓은걸 좋게 볼리가 없을만도 하지요. 결국 병기국은 해결책으로 포방패와 360도 사격을 위한 방열기구를 추가한 개량형인 T53E1을 내 놓습니다.


개량형 T53E1이죠.
이걸 "무슨 약을 하시기에 이런걸 만드셨나요?"라고 조롱하는 것은 쉽습니다만 전차 차체 위에 대전차포를 얹는다는 점에서 독일의 마더시리즈와 비슷한 발상을 한겁니다. 오히려 360도 사격이 가능한 회전포탑을 채용하고, 이를 위해 서스팬션에 방열기구를 달아버린다라는 해결책을 제시한거지요. 독일의 돌격포, 구축전차, 대전차자주포들이 포각 밖에 목표가 위치하면 방향전환을 위해 차체를 틀어야되지만 T53E1는 포탑만 돌리면 된다는 이점이 있습니다. 물론 M10만도 못한 임시변통 디자인인 T53의 양산 계획은 백지화 됩니다.
병기국은 T53과 T53E1의 실패를 통해 90mm포 기구를 소형화시켜서 전차와 대전차자주포에 탑재해야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1942년 10월부터 M10에 T7 90mm 포를 얹는 개발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105mm 곡사포나 17파운드포를 위해 설계된 포가에 90mm를 얹고, 3" 이상의 포를 장착이 고려되지 않은 M10의 포탑에서 기술적인 문제가 발생하지요. 병기국은 포탑 밸런스 문제 해결, 포탑선회장치 강화, 탄약저장고 재설계를 고려해봤을때 신규 포탑을 개발하는 것이 낫다고 바로 결론을 내립니다.

90mm포 장착 가능성을 확인해본 T7 90mm포 장착 M10
정작 문제는 맥네어 대장이 아니라 대전차자주포 센터의 브루스 준장이였습니다. 고속, 고기동성을 중시하는 이 양반이 보기엔 1)M10도 느린데 거기다 더 무거운 90mm 포를 달면 더 느려질테고 2)3"포보다 더 강한 주포는 별로 필요가 없을 꺼라고 생각했던거죠.(주1) 결국 미국 지상군 사령부와 병기국의 지원(90mm포 탑재 대전차자주포)을 무시해버립니다.

병기국의 반격 T71 90mm GMC
병기국은 이에 굴하지않고 43년 9월에 M10A1 차체에 신형 90mm포 장착 포탑을 얹은 T71 90mm GMC를 포드사에 발주해서 그 달에 받아내지만 양산은 기각당합니다. 이번엔 38년부터 병기국 담당관이였던 반즈(Gladeon M. Barnes) 소장이 당시 개발 중이였던 90mm포 중전차(데버스 중장이 지원하던 T26E1)와 함께 90mm포 대전차자주포 양산에 압력을 행사하고, 1943년 10월 결국 미국 지상군 사령부는 진지공격에 대한 직접화력지원과 독일군 전차 장갑 강화에 대비하는 목적으로 T71의 양산 계획을 수락하며 병기국의 손을 들어주지요.

최종 결과물 90mm GMC M36
T71 90mm GMC 양산이 이루어지기 전에 기관총 마운트위치 변경, 발사시 섬광 문제를 해결하는 머즐브레이크 설치 등 몇가지 개량를 거칩니다. 44년 1월 포탑 없이 제작 완료된 300대의 최종생산분 M10A1의 차체를 바탕으로 44년 4월부터 포탑과 차체의 통합을 시작하고, 44년 6월 1일로 90mm GMC M36라는 정식형식명칭을 받아냅니다. 추가적인 미국 지상군 사령부의 요청과 노르망디 상륙 이후 3"포의 위력에 실망한 전선의 요청으로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미국내 훈련용으로 배치된 M10A1차체에서 포탑을 변경한 M36, 급한대로 M4A3 차체에 포탑을 탑재 M36B1, M10의 차체에 포탑을 탑재한 M36B2를 모두 합해 1460대를 찍어냅니다.

46년 에니악 정비기록부를 살펴보는 머클리(좌) 반즈 소장(중) 에커드(우)
사족: 쿠르스크 전투에서 노획된 판터를 통해 43년 가을경에는 성능 보고서가 이미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탈리아에서 판터를 직접 마주친게 늦어도 44년초 안지오 상륙 이후라는 걸 생각해보면 노르망디에서 판터쇼크의 책임은 후행적일 수 밖에 없는 원칙주의[필요성과 신뢰성]를 고수한 미국 지상군 사령부에 있다고 봐야겠죠.
주1: 부루스 준장의 문제는 42년에 장차 독일이 어떤 야수들을 만들어낼지 상상하지 못했다는 거지요. 노르망디에서의 3"포의 판터에 대한 관통력 부족 보고가 쏟아진 이후에야 미국 지상군 사령부와 유럽 전구 사령부는 3"의 위력부족을 실감합니다.
덧글
(특히나 잉기리들의 분류는 뭔 소리를 하는건지... 보고 있어도 멍...해졌었던 기억이...)
여담이지만, 지금의 양키 분류라면...그냥 '공군'으로 끝날겁니다. (아 그때도 그랬던가?)
예나 지금이나 양키는 포병과 항공지원아래 두들겨 패는걸 좋아합니다. 덤으로 빵빵한 보급도 필수지요.
발만 빠르면 장땡이라고 생각하는 브루스 중장이 헬캣 같은 이상한 대전차 자주포 대신
진작에 M36 슬러거를 만들었으면
90밀리 주포를 탑재한 차량이 좀 더 전선에 일찍 배치됐을지도 모른다는 늬앙스를 풍기더군요.
실제 기동력 페티셔 브루스 준장의 고집으로 인해 병기국과 대전차 자주포 센터는 사이가 많이 안 좋아졌으니까요.
그리고 원리원칙주의에 앞서 미군 지상군 사령부을 상대로 강력하게 요청하려는 의지 자체가 미국 유럽 원정군 총사령부에 없었다는 건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일단 제대로 된 주장이 있어야 그에 대한 반응이 나오니까요. 1944년 2월 말만 해도 노르망디 상륙까지 3달 이상 남은 시점이라 호구지책이라도 가능한 시점이었죠. 하지만 이후 3달 넘게 '판터 쇼크'를 막아보겠다는 의지 자체가 안 보였죠. 데버스 중장만이 티거나 독일 중돌격포를 상대하기 위해 중전차 대량 배치를 요구하고 있었고, 이 주장은 맥네어에 의해 묵살당하고 말았죠.
덧붙여, 미국 기준에 따른 잘로가 영감의 소련 전차 구분이 흥미로운데 T-34를 기병전차, KV-1을 보병전차라 불렀죠. 물론 엄밀한 구분은 아니고 당시 미군의 관점에 따르면 이럴 수도 있다는 얘기죠.
또한 뒤늦게라도 판터에 대한 대비책으로 떠오른게 M36 잭슨이였던걸로 판단됩니다. 1)본문에 적어둔 "독일군 전차 장갑 강화에 대비하는 목적", 2)M10C-17pdr 아킬레스 개장도 M36 잭슨 생산(M10A1 차대에 90mm 포탑장착)하고 거의 같은 시기에 이루어집니다.
미국 지상군 사령부의 원칙이 욕을 먹어야하는건 전략적으로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대응해야되는 위치에서 필요성(Battle needs)과 신뢰성(Battle worthiness)을 고수해서 미국의 병기체계가 계속 후행적이며 보수적으로 흐를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이죠. 이전의 데이터가 주는 것은 그 전까지의 추세와 현상 밖에 제공해 줄 수 없는데, 이걸 붙잡고 앉아있어봐야 미래가 보이는건 아니지 않습니까?
rumic71님// 미군도 필요하면 전차나 대전차자주포에다 애들 바리바리 얹어서 다녔으니까요. 냉전시기에 M60이나 M1은 아예 어디다 보병 올려두라는 FM까지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 http://gall.dcinside.com/arm/88581